2020년대 중반 미국의 통상정책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방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공급망 독립, 산업안보, 기술통제, 기후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한 제도화된 보호무역 조치들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WTO 규범과의 충돌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Buy American Act, CHIPS Act, 수출통제, 안보 예외 조항 등은 미국 내 산업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외국산 제품과 해외기업에 대한 차별 조치로 작용하고 있어 WTO 규범과의 법적 충돌 가능성이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보호무역 조치의 확대 양상
2021년 이후 미국은 다음과 같은 대표적 보호무역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 IRA (Inflation Reduction Act): 전기차·배터리·청정에너지 분야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북미 생산·FTA국 원산지 조건 부과
- Buy American Act 및 행정명령 14005호: 연방조달 계약 시 미국산 부품 사용 비율 65~75% 이상 의무화
- CHIPS & Science Act: 반도체 산업 보조금 제공, 중국 내 확장 제한 조건 부과
- 수출통제 규정(EAR): 중국과의 AI·반도체 기술 이전 제한, 글로벌 기업도 적용 대상
이러한 정책들은 명목상으로는 기후, 안보, 첨단기술 보호 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외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입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거나 차별함으로써 비관세장벽(non-tariff barriers)의 실질을 가집니다.
WTO 핵심 규범과의 충돌 분석
미국 보호무역 조치는 WTO 협정의 여러 핵심 조항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GATT 제1조 (최혜국대우): 특정국(FTA국 등) 제품만 우대하고 비가입국은 배제 → MFN 원칙 위반 가능
- GATT 제3조 (내국민대우): 동일 상품임에도 외국산 제품에 대해 세액공제 배제 → 실질적 내국민대우 위반
- 보조금 및 상계조치 협정(SCM): 특정 산업과 생산지역(미국)만 보조금 수혜 → 특정성 요건 충족, 무역왜곡적 보조금 판단 가능
- 기술장벽협정(TBT): 수출 통제·표준·조달 규정이 불합리하게 외국 제품 차별
특히 IRA는 전기차 세액공제와 관련하여 북미 조립 요건과 FTA국 원산지 조건을 부과하는데, 이는 사실상 특정 국가 또는 기업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로, WTO 규정상 '무역을 조건으로 한 금지 보조금'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Buy American 조항은 TAA(무역협정법) 적용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BAA가 우선 적용되는 계약이 확대되면서, 한국을 포함한 FTA국 기업조차 실질적 차별을 받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WTO 규범 회피 방식과 논리
미국은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WTO 규범을 직접적으로 위반하고 있다고 보기보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규범 예외 또는 회피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 GATT 제20조 (일반 예외): 환경 보호, 공공의 안전,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예외 주장
- SCM협정의 예외 해석: 세액공제는 직접적인 보조금이 아니므로 금지보조금으로 해석 불가 주장
- 상소기구 기능 정지 상태 이용: WTO 분쟁해결기구(DSB) 상소기능 마비 상태에서 패널 결정의 실효성 약화
즉, 미국은 통상법의 기술적 허점을 활용하거나 다자 규범의 '기능적 한계'를 이용하여 사실상 규범을 우회하는 전략적 통상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한국 및 주요국의 대응 전략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 보호무역 조치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 한국: 한미 통상채널을 통한 세부지침 조정, 북미 현지생산 확대, WTO 제소 검토
- EU: IRA, BAA에 대해 '차별적 보조금'으로 규정하고 자국 중심 그린보조금 법제 마련
- 일본·캐나다: 광물 협정, 반도체 협정 등을 통해 미국 보조금 대상 포함 유도
하지만 WTO 상소기능이 정지되어 있어 분쟁해결을 통한 실효적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며, 결국 각국은 외교적 협상, 산업정책 조정, 자국내 보조금 제도 정비를 통한 복합 전략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결론: 보호무역 vs 다자규범의 충돌, 어디로 가는가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는 자유무역체제의 중심이던 WTO와 규범적 충돌을 넘어, 통상정책의 방향성과 기준 자체에 대한 철학적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WTO 규범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글로벌 규범의 ‘설계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적 시도를 하고 있으며, IRA, Buy American, 수출통제 조치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정책적 실험장입니다.
한국은 이에 대응해 기존의 다자주의 원칙을 지키되, 동시에 산업전략, 외교전략, 공급망 전략을 통합하여 ‘규범 기반 유연대응 체제’를 수립해야 하며, WTO 개혁 및 차세대 무역규범 논의에서 능동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